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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문제지(ReCM)
은혜나누기
 
 
 

작성자
 
오은총
작성일
 
2016/07/07 08:44:12
 
조회수
2921
글제목
 
2106 바이블캠프 주제 4강
링크
 


 2016 CMI 전국 바이블 캠프 주제 4강 메시지
 
  오은총 목자
 
  외면당하는 십자가
 
 말씀 : 누가복음 23:1-56
 요절 : 누가복음 23:34
 
  우리는 이번 2016년 CMI 전국 바이블 캠프를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 잃어버린 한 영혼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듣고 그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했습니다. 오늘 주제 4강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라고 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교회 첨탑 끝에 세워진 십자가, 힙합가수들이 착용하는 장신구 등이 떠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십자가가 제가 가는 길의 이정표처럼 느껴집니다. 성경본문이 말하고 있는 십자가는 모든 죄인을 죄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언도받으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우리는 외면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 십자가 의미를 다시 살펴보고 그 십자가를 외면하는 자들을 향하여 끝까지 용서의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영접하길 기도합니다.
 
  본문을 크게 세 파트로 나누어서 전하려고 합니다. 순서대로 십자가형을 언도받으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 화목하게 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형을 언도 받으신 예수님입니다. 누가복음 23장 1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무리라는 것은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를 따르는 백성들을 말합니다. (인터넷에 빌라도를 검색하면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로마인.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결정적인 자리에 있다보니.. 약간 불쌍. ‘하필 그 자리에 있던 게 나였다면 여떻게 되었을까요?’) 빌라도는 유대를 통치하는 총독이었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무리가 예수님을 벌하고 했던 것은 신성모독죄였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로마에서 내려온 총독이 관여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무리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반역 죄인으로 고발합니다. 3-5절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합니다. 무리는 그런 빌라도의 말에 저항하며 끝까지 예수님이 백성을 소동케 했다며 죄인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빌라도는 그 책임을 헤롯에게 넘기고자 합니다. 8절 이하를 보면 헤롯은 예수님을 매우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에 대해 소문을 듣고 지냈고, 또 기적을 행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헤롯은 여러 말로 예수님께 물었으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15절에 나온 바와 같이 헤롯 역시도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고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13절에서 22절을 보면 빌라도는 무리들을 다시 불러 모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무리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는 세 번째로 그들을 설득합니다. 하지만 무리들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그에 따른 결과는 24,25절에 나온 바와 같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주고 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하니라” 빌라도는 그의 소신에 따라 판단할 때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는데 백성들의 요구에 승복하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자기가 생각하는 진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요.
 
  빌라도는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통치자였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민심이었겠지요. 보통의 백성부터 높은 종교적 지도자까지, 무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무리의 강한 요구를 마음대로 거절하는 것은 그의 자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빌라도는 한 집안의 가장이었겠지요. 자기만을 바라보는 아내와 키워야하는 아들딸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양해야 할 어머니 아버지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기의 신념만으로 행동했을 때 잃어버릴 수도 있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 십자가형벌을 언도한 일이 정당화 될 수 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우리 역시도 그 상황에서 비슷한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족과 친구들 나의 직업, 사람들 사이에 쌓은 인망 등이 있겠죠. 예수님이 상처투성이의 몰골로 마치 세상에 지신 것처럼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소중한 것들을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이 잘 들지 않을 때 여러분은 계속해서 주님의 곁에 서있겠다 자신할 수 있나요?
 
  특히 요즘, 우리는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더 좋을 것 같은 분위기 속에 단체 속에 위치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괜히 한마디 더 물어올 것 같은 주제들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숨기곤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조차도 단단하게 지켜내기가 힘든 자들입니다. 이런 문제의 중심에는 빌라도처럼 나의 안위가 첫 번째 되어야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나의 편협한 시선으로 정의해놓은 행복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결국 진리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예수님은 판결처럼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무리들의 강요로 사형언도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민족들로부터 버림받으셨고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26절부터 43절 까지의 말씀입니다. 26절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형을 언도받은 이후 골고다 언덕길을 따라서 끌려가셨습니다. 십자가의 무게는 40~50kg정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성인 남자라면 끌고 갈 수 있을만한 무게인데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계속된 심문과 채찍질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속해서 넘어지고 또 쓰러지자 하는 수 없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자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습니다. 27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 뒤로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슬피 울고 있습니다. 아마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병을 치료받은 사람도 있었을 수 있고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의 자리에 함께 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큰 스승이었고, 생명의 은인, 정신적 지주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매우 슬퍼합니다. 너무도 감사한 예수님이 무고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으니 그 슬픔은 더욱 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을 향해 우는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29절에서 31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9절에 보라 날이 이르면, 30절에 그 때에 라는 말은 마지막 심판의 때를 말합니다. 이때가 되면 심판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사람들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고 소리칠 것이라고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보다도 심판의 고통 아래에 놓여있는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하여 애통해하며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죄와 그 심판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죄를 얼마나 가볍게 여깁니까? 법을 어기거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를 범하지 않으면 죄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나는 착하게 살고 있는데, 왜 죄인이라고 하는지 도리어 의문을 갖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살지 못하면 그 자체로 죄입니다. 이처럼 우리 죄를 가볍게 여기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나의 죄 문제에 대하여 더욱 애통한 심정으로 울어야 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님은 해골이라 불리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박히셨습니다. 다른 사건들과 대비해서 볼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서술이 되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쩌면 후에 이 일을 기록하는 제자들에게 있어 가장 기억하기 힘든 장면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때에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첫째로 그곳에는 군병들이 있습니다. 34절 하반절과 36절을 볼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병사들은 옷을 나눠 제비뽑고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하나의 유흥거리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그저 좀 유명한 사람의 사형집행식일 뿐입니다. 진리와 사랑, 구원 같은 주제들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사형을 집행하고 그 지루한 시간을 희롱하며 때우고 있는 자들입니다. 무감각하고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두번째로 백성들은 서서 구경합니다. 이들 중에는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함께 있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자기들의 일이 아닌 것처럼 구경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관원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네가 모두를 구원할 수 있다며? 그러면 지금 매달려있는 너 자신을 구원해 봐라. 비아냥거립니다. 이들 중 예수님의 말씀들을 마음열고 들은 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바리새인들의 말을 듣고, 종교 지도자들의 비아냥거리는 말을 듣고, 인간적인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본 적도 없으면서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39절에는 마지막으로 달린 행악자 중 하나가 나옵니다. 그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마저도 망각했습니다. 죄 값으로 받는 형벌 중에 주님을 비방합니다. 단지 자신의 고통에 분노하여 예수님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순간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예수님은 왜 모두로부터 소외당해야 했습니까? 이사야서 53장 5절에서 6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이 창에 찔리고, 몸이 상하고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신 모든 이유는 순전히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 3절,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다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주님을 멸시하고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국 외면당하고 버림받았지만 그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구원하는 구원의 십자가요 용서의 십자가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침묵하시는 예수님은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외면하고 버렸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의 죄된 속성이 마음속에 고개를 들 때마다 예수님은 다시 새로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십니다. 시편 22편 14절에서 17절을 보면 우리는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물같이 쏟아지고 뼈가 어그러지고 그 마음은 아픔으로 뜨겁다가 못해 밀납 처럼 녹아버렸습니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보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백성들처럼 그저 서서 구경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예수님의 가르침들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은 하지만 여전히 죄짓고 나의 생활을 유지하며 그저 마음 한번 편해보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요? 또 군병들처럼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모습은 아닌가요.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이라 말하며 양심이 마비된 채 죄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나요. 그 죄 된 시간들을 회개가 아닌 다른 유흥으로 채우고 있는 않나요. 관원들처럼 대다수가 조롱거리로 삼기도 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나를 재미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은 규약들에 불만하며 예수님을 비웃은적은 없나요? 우리는 너무도 무지하고 망각에 익숙합니다. 주님에게 모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고 마지막에는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마저도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한 근본 원인은 우리입니다.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손해 보는 일, 억울한 일을 절대 참지 못합니다. 일이 잘못될 때면 나의 진정한 의도가 제대로 전해지 않을까 정말 많이 두려워합니다. 이런 행동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생명 하나 더 살리고자 살아오신 예수님을 조롱하고 외면하고 무관심했던 것은 우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지막에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마구간에서 건초더미 사이에서 태어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제 사람들이 욕하는 범죄자의 누명을 쓰고 마지막까지도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나 자신을 위하여 예수님은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용서의 깊이는 내가 가지고 있는 존재 자체의 죄까지도 용서해 주시는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이런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저와 우리를 향한 온전하고도 완전한 용서임을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무심한 사람이었습니다. 2013년 2월에 대학에 처음 들어와서 이제 삼년 하고도 반년이 더 되어 갑니다. 신입생 시절의 저에게는 영적인 욕구도 있었으나 세상에 대한 욕구가 더 컸습니다. 내 용돈 버는 일이 우선시되고 그날 하루 더 재미있을 것 같은 일이 우선시 되었습니다. CMI에서 함께 예배드리고 공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저에게 안전선이었습니다. 스스로 신앙에서 멀어져 정죄함을 받을까 두려운 마음에 걸어놓은 최소한의 한도였습니다. 완악해져가는 저였지만 주님은 저를 계속해서 다시 부르셨습니다. 말씀을 읽게 하고 십자가를 보여주시며 깨달음을 얻게 하셨지만 저는 고무줄처럼 원위치로 돌아갔습니다. 마음이 더 편했을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것은 내가 죄인 됨을 부인하는 일이고 세상에 가깝게, 세상에 안주할 수 있는 일이니 그게 제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해서 십자가의 역사가 없었던 일이 되지도, 나의 죄가 없는 셈 쳐 지지도 않았습니다. 2015년 약학대학에 편입하여 공부를 시작한 저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함께 매일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고생하며 입학한 과에서 학업에도 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연구직을 꿈꾸며 왔는데 잘하는 과목도 없고 마음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매일 짜증만 내고 술이나 마시자 하며 지냈습니다. 편입 전에 원래 다니던 생물교육과의 친구들을 부르며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낮에는 수업을 빠지고 그저 밖을 돌아다녔고 밤에는 술자리를 찾아다니며 이성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생각하며 살아가는 나’를 지워버리려 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던 중에 술자리에서 두세 번의 불미스러운 일들이 생겼고 저는 저의 죄악 된 속성과 마주했습니다. 그 죄악 된 속성은 신경 쓰지 않고 지내는 동안 더 어둡고 크게 자라나 튀어나온 듯해서 저는 어떻게 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친구도 전문 상담사도 주변의 어떤 것들도 저를 편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기도와 말씀이 없이는 해결되지 않을 문제에 직면했을 때 신앙에 안이했던 저는 십자가가 생각나지 않아서 방황했습니다. 저는 그제야 모든 걸 내려놓고 주님을 찾으면서 회개했습니다. 책임감을 피해 도망 다녔지만 주님이 지신 십자가에는 저의 죄도 매달려 있었습니다. 주님을 한없이 외롭고 지치게 했을 저의 죄가 부끄러워 울었습니다. 제가 언제나 죄인이었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갔을 때 주님은 가장 먼저 마음을 위로하시고 이후 천천히 모든 일들을 풀어주셨습니다. 모든 일의 해결 뿐 아니라 제 마음의 무거움까지도 용서의 말씀으로 풀어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덧입어 담대함으로 학과에 적응하고 공부도 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언제 깨닫더라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안타까움이 드는 것이 저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금년 초 목자학교에서 소감을 발표하며 저는 3년 전 성탄 수양회 때 전했던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시 영접했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 저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최고의 사랑의 관계를 갈라놓은 장본인 이었습니다. 이번 말씀을 준비하며, 예수님 앞에서 죄인 된 모습의 발견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을 다시 영접하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는 단 한 번의 기도로 나를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변화시켜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길이요, 능력의 길인 것을 믿습니다.
 
  이후 40절에서 41절을 보면 두 행악자중 한 사람의 말이 나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39절에 등장한 예수님을 비방하는 행악 자를 함께 매달린 다른 행악 자가 꾸짖는 장면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죄를 알고 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4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그는 예수님께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그를 인정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4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는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가 용서함 받은 자로서의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이 십자가는 화목의 십자가이자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십자가를 통해 화목케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본문 44절에서 5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숨을 거두십니다. 44절에서 46절 말씀입니다.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세상이 어두워집니다. 제 육시부터 구시는 오후 12시에서 오후 3시까지의 시간입니다. 가장 밝게 빛날 시간에 해는 빛을 잃습니다. 성소의 휘장이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장 은밀한 곳인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휘장이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 일 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대속죄 일에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 외에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장벽이었습니다.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했던 이 휘장이 주님의 죽음과 함께 찢어집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받아 이제는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관계의 회복이 일어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6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는 유대인과 할례를 받지 않은자라 불리던 이방인이 이제 하나님 아래에서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회복된 관계인 것입니다. 47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절, 49절에서도 무리와 많은 사람들이 모든 사건을 보고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이후 예수님의 죽은 몸은 공회의원 중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는 자에 의해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 없는 바위에 판 무덤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역사입니다. 십자가는 부활 이전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패배 같은 것이 아닙니다. 가장 멋지게 세상의 악한 것들을 이겨낸 것이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짓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으려 하는 모든 악한 것들로부터의 승리입니다. 제가 지난 작년부터 쭉 붙잡고 지낸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공부가 힘이 들 때,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세상의 벽이 너무 높아 보일 때마다 떠올린 말씀입니다. 나의 죄 문제를 들고 찾아갔을 때 마주한 십자가는 저를 깊은 절망에서 꺼내 올렸습니다. 그 승리의 말씀을 경험한 저에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는 말씀은 엄청난 힘이자 위로였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로 저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고 묵묵하게 기도로 할 일들을 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일이 생기더라도 주님의 마음을 떠올리며 침착하려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캠퍼스에서 목자로 지내며 양 한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학과와 캠퍼스를 위해 기도할 때에도 항상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을 초대하고 섬기는 일이 내 마음처럼 되지 않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다른 일들도 너무 바쁜데 신경 써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고 귀찮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이전에 나를 지켜보고 계속해서 부르신 주님의 모습과, 힘에 부치는 문제로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울며 나타난 저를 언제고 다시 용서해주시는 그 모습이 떠오르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이기적이고 감사함을 몰랐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들에게도 주님의 용서의 메시지가 닿아서 저들을 생각하는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이번 바이블캠프를 통해서도 저는 연약함과 영적인 무감각함을 인식했습니다. 소감을 쓰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시험기간 탓에 준비를 시작하지 못하다가 늦게서야 소감을 쓰기 시작했는데, 삼주정도의 시험기간에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있었습니다. 말씀도 말씀이지만 나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제 마음을 힘들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고 있는가 싶었고 방향을 잘못 잡아 아예 전체를 뒤집어야 했을 때는 반나절정도를 한숨만 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 바이블캠프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이 캠프에서 학생 목자들의 소감을 통한 간증과 주제 메시지를 들으며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모든 목자님들이 편한 일처럼 자기의 이야기를 꺼내놓았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이야기, 자기의 가장 약한 면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며 저는 어쩌면 저들은 저렇게 강할까를 생각했습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그 안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말하는 목자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저를 뉘우쳤습니다. 모두들 자기의 약한 면을 드러내는 일은 힘들겠지요. 그럼에도 그렇게 강할 수 있는 이유는 말씀을 듣고 한명이라도 더 주님 곁으로 나아올 수 있다면, 힘든 경험들 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전한 말씀을 떠올리며 주님을 찾을 사람이 한명 더 생긴다면, 주님이 내 삶에 역사하셨던 이야기는 몇 번이고 다시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첫째아들은 딱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간절히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고 계신지 알면서, 저는 불편함 때문에 그 마음을 외면했습니다. 매 예배 때마다 저는 회개했고 그런 저를 주님은 다시 용서하셨습니다. 이렇게 모두의 앞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아마 계속해서 저를 시험할 것입니다. 삶에서 주님을 최우선순위에 두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면 항상 저는 또 우리는 시험에 빠지게 되겠지요.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채로 십자가를 지고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생각할 때 저와 여러분은 다시 한 번 내 삶의 이유를 바로잡으며 주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바이블캠프를 준비하고 말씀과 소감을 준비하고 또 참여하여 함께 하는 모두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나의 죄로 인해 피 흘리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 핑계로 주님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 끝없는 용서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가 이 십자가의 말씀을 영접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영접하고 바이블 캠프 이후에 각자의 삶에서 십자가 예수님에 의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기를 기도합니다. 구원받고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간 이후로 십자가 은혜를 영접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구원의 기쁨을 만끽하는 인생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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