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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문제지(ReCM)
은혜나누기
 
 
 

작성자
 
신요나단
작성일
 
2013/08/25 21:12:15
 
조회수
1715
글제목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라
링크
 


 <2013년 여름 수양회>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라
 
 신요나단(생물교육 08)
 
 본문: 예레미야 1:1~10
 요절: 예레미야 1:7
 
  오늘 이 말씀을 2번째 주제 강의로 선택하게 된 주된 이유가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처한 상황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할지 바로 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레미야 1장 1절에서는 이 말씀이 예레미야의 말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이어지는 2~3절에서는 예레미야가 있었던 시대 상황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시기가 언제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때의 시대 상황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힌트가 3절 후반부에 나와 있습니다.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입니까? 사로잡혀 간다는 것으로 보아 어떤 강국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끌려가는 좋지 못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기는 바벨론이 패권을 쥐고 있던 때였습니다. 한 때 강대국이었던 애굽과 앗수르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고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정확히 말하면 유다 또한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기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특별한 자리에서 말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의 족보를 알 수 있습니다. 누구의 아들이라고 나와 있습니까?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혈통적으로 예비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후일에 하나님의 민족을 이끌어 가야하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아마 어렸을 적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배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어김없이 말씀으로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 요시야 십 삼년에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자, 1~3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과 예레미야 사이의 유사한 점을 찾으셨나요? 어떠한 점에서 예레미야가 여러분들과 유사할까요? 먼저 예비 지도자라는 점에서 예레미야와 우리는 매우 유사합니다. 서울대 학생들 또한 예비 지도자로서 키워진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저학년 학생들은 이 점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저학년 때는 ‘서울대 학생’ 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우리 학교에 예비 지도자를 키우는 과정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적응해가고, 다니면 다닐수록 학교 내에 지도자, 리더를 키우고자 하는 지향점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저희 과 교수님과 상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평범한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던 제게 교수님은 서울대에 왜 왔는지, 좀 더 큰 꿈을 가지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서울대에 왔다면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갖고 공부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때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가 지도자를 키우는 것에 목적이 있는 학교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은 흔히들 말하는 특권 의식, 엘리트 의식과는 다른 느낌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 학기 동안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또 한 가지 예레미야와 유사한 점은 어떤 것입니까? 시대적 상황입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망하는 그 시점에 살았고 그 시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끝자락에 예비 지도자로서 그는 민족 앞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현재 세계는 어떠합니까? 우리나라는 어떠합니까? 서울대학교는 어떠합니까? ‘자유’라는 명분 아래 현재 세계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질서 아래 있지 않습니다. 동성애가 만연하고, 새로운 종교와 이단이 속속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전쟁이 일어나고 영토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심하면 심했지 더 낫지 않습니다. 세계의 모습들은 너무 멀게 느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삶의 현장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서울대학교는 오히려 더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현재 우리나라에 만연한 반기독교적인 감정이 서울대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개인주의적인 사고와 극단적으로 이성과 논리에 의존하는 서울대생들을 보면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심지어 식사 전에 기도하는 것조차 눈치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캠퍼스 목자로 선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선다는 것은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국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도자로 선다는 것과 매우 유사하지 않습니까?
 
  예레미야는 그러한 시기에 자신이 예비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에 크나큰 부담을 느꼈을 것입니다. 나서기가 겁났을 것이고, 나선다고 해도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무력함을 느끼고 좌절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시면 어떡할까, 내가 하필 그 총대를 메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두렵고 이에 대해서 거절할 핑계를 여러 가지 찾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예상대로, 어김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5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예레미야의 예상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셨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의외의 자리로 그를 부르십니다. 제사장의 아들인 그에게, 민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설 것을 명령하십니다. 아니 이미 그는 여러 나라의 선지자, 열방의 선지자로 계획되었고 구별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비 제사장인 그에게 선지자로의 부르심은 약간 생뚱맞은 말씀이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제사장의 일들을 보고 배웠을 그에게 선지자라는 직분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맞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자신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선지자 교육을 받은 사람 말입니다. 또한 그는 선지자가 되는 것은 이 시대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역사만 바라보아도 알 수 있듯이 통상 선교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하면 잘 사는 나라가 못 사는 나라를 도와주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와 같은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 말입니다.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선교사라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훌륭한 제사장이 되어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에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모습을 그는 그렸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 또한 그는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선지자가 될 것을 명령하셨고 이미 전부터 그것을 계획해 오셨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갑작스럽게 노선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예레미야에게 그런 뜻과 소망을 두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것도 예레미야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말입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단번에 이것이 떠올랐습니다. 서울대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고 있던 저에게 목사님이 매번 교대를 위해서 기도하고 교대 땅을 밟으라고 하셨던 것 말입니다. 아니 내가 서울대학교 학생인데 교대는 왜 가는 것인지, 정말 생뚱맞고 어이없는 이 상황이 예레미야의 상황과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이것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시고 예레미야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부르신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위기에 빠진 민족과 나라를 보았고 이를 바벨론으로부터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반면 하나님은 그와 다른 입장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땅의, 여러 나라의 영혼 구원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셨고 이스라엘 민족이 빠진 위기가 영혼 구원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은 ‘멸망’이 아니라 ‘선교사 파송’이었던 것입니다. 여러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역사의 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입장에 서야 할까요? 어떤 눈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우리는 사람의 입장, 민족의 입장, 세상의 입장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의 입장에서 영혼 구원에 목적을 두고 살아야 할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바꾸는 것을 ‘paradigm shift’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 시대에서 우리는 주로 어떤 눈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어떤 눈을 갖고 살아야 할까요? 현 시대에 우리 청년들은 대부분 개인주의적인 사고를 하며, 따라서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쾌락을 통해서 얻고자 합니다. 높은 지위를 통해서 얻고자 합니다. 부를 통해서 얻고자 합니다. 위기에 빠졌을 때, 고난에 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했다고 생각하고 좌절을 거듭합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겪어왔기에 알고 있겠지만 세상이 추구하는 것들, 쾌락, 지위, 명예, 부, 이러한 것들이 정말로 진실하고 영원한 행복과 자유를 누리게 해주는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모든 영광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고 행복했지만 그 순간뿐이었습니다. 위기와 고난은 언제나 항상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좌절했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다른 것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성취하고 난 뒤에는 언제나 목마름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난은 또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고난 앞에서 좌절하는 것은 망하는 나라와 민족을 보았던 예레미야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민족의 입장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나라가 망해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나라가 위기를 겪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시대적 상황을 위기로 보지 않았습니다. 고난이 아니라 기회로 보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예수님은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0장 20절에서는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원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 주님이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따라 가야 하며, 하나님의 영혼 구원 역사에 동참해야 합니다. 세상의 눈이 아닌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곳으로 자신의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 또한 고난을 고난이 아닌 기회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앞에서 예레미야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6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정말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유사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보면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간사님께서 무언가 제안을 하셨을 때 저도 예레미야와 같이 똑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것을 할 자격이나 있을까요?”, “영적으로 아직 많이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감정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난 도저히 할 수 없을 너무나도 큰일이라 생각하는 부담스러운 마음과 이 일을 했을 때 내가 져야할 희생과 헌신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그것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부담스러운 마음보다 희생과 헌신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라고 생각이 듭니다. 물론 부담스러운 마음도 매우 중요한 불순종의 이유가 되기 때문에 부수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의 크고 작음을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대체적으로 현재 저를 비롯한 청년 대학생들에게 희생과 헌신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크나큰 이유로 작용한다는 것을 모두 부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세계에 만연한 개인주의를 넘어선 이기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것에 희생과 헌신을 했을 때 내가 계획했던 인생 계획이 틀어지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사람이기 때문에 희생과 헌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분명 있었겠지만 말씀에서 나는 아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것보다는 그 크나큰 사명을 감당하기가 도저히 어려울 것 같은 부담감과 외국 선교사로서의 갖춰야 할 능력이, 즉 외국어 능력이 갖추어지지 못했다는 점이 주된 이유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가장 앞에서 “슬프도소이다”라고 말했던 것으로 보아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능력이 없는 자신에 대해 안타까운 감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말할 시간을 더 주었더라면 그 또한 우리와 같이 희생과 헌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여러 가지 또 다른 핑계를 대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을 통해 나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계획하신 것이라고 확신하며 애써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입맛에 맞게 말씀을 재해석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힘들 때 가장 먼저 나의 능력과 역량의 부족함을 근거로 들며 주님의 명령을 거절하지 않습니까? 예레미야가 똑같이 그러했습니다. 저를 예로 들어보면 하나님의 캠퍼스 목자로의 부르심에 저의 첫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학생인데 다른 학생들에게 어떻게 말씀을 전합니까? 학생들이 성경에 대해 물으면 저는 그것에 답해줄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학생 때는 배워야할 때이지 않습니까? 조금 더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말씀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 그 때 목자로 서도록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하기가 싫습니다. 싫은 데도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지 않으시잖습니까? 은혜로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들어가 있습니다. 내 인생 계획이 틀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주된 것이고, 부수적으로 귀찮음과 이 일을 감당함과 동시에 내가 버려야할 세상적인 즐거움들에 대한 아까운 마음 등이 그것입니다. 이제 정말 우리의 반응과 예레미야의 반응이 유사하다는 것을 잘 아시겠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이러한 우리와 예레미야의 반응이 핑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앞에서 제가 핑계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 이것을 핑계라고 말한다면 저는 정말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앞에서 핑계라고 말하는 데 그 말에 왜 이렇게 거부감이 드는 것인지…. 핑계라는 소리를 들으면 저는 아주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했던 반응, 제가 했던 반응 모두 근거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합리적이고 마땅히 들 수 있는 거절의 사유가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와 저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이고,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현실을 직시한 것이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것입니다. 핑계라고 치부해버리기엔, 가볍게 넘겨버리기엔 무리가 있는 반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7, 8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7)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8)” 하나님께서는 먼저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예레미야는 분명히 아이가 맞습니다. 하나님 역사를 감당하지 못하는 아이가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 ‘아이’라는 단어에는 현실과 세상적인 기준이 들어가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았을 때 예레미야는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하기에는 무능력하고 작은 자입니다. 그리고 그 또한 이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혼 구원의 역사에 동참한다는 것, 말이 쉽지 이 얼마나 큰일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아이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라” 이 말씀에는 세상의 기준을, 세상의 눈을 버리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눈을 가져야 할까요? 8절에서 하나님께서 친절히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세상의 눈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능력이 없고 초라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캠퍼스 목자로서의 부르심을 받들기가 정말 어렵고 힘이 듭니다. 내가 말씀을 선포하였을 때 나에게 쏟아지는 여러 비난들과 반문들이 두렵습니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깨어질까봐 두렵습니다. 학생들이 너도 같은 학생인데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느냐고 자격을 운운한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특히 우리 학교는 더 두렵습니다. 머리 좋고 똑똑한 이들과 논쟁할 수 있는 능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며 시선을 옮기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전에는 세상의 눈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의 평가와 평가 받는 나의 형편을 보았지만 이제는 함께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에 순종하기 힘듭니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무능력한 자에게 냉정한 평가를 내립니다. 쉽게 말해서 스펙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영혼 구원 역사에 동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이러시는 걸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능력 있고 준비된 다른 이들이 많은데 나를 택하시고 부르셨을까요? 처음에 7, 8절을 보고 제게 문득 떠올랐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8절 말씀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스펙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믿음으로 평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거룩한 뜻과 사명으로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능력으로 평가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최상으로 우리에게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신실한 믿음의 종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주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고 주님 주신 사명을 영접하는 이가 최고의 사람이요, 최고의 자녀입니다, 최고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이 보았을 때는 금그릇도, 은그릇도 아닌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은 보배로운 질그릇입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이상적인 길과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길, 그리고 금그릇과 질그릇,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7절 후반부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우리에게 이 말씀을 적용한다면 어떤 말씀이 될까요? “너에게 붙여주시는 캠퍼스 영혼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내가 명령한 그 말씀을 선포하라”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일대일을 통해서 말씀을 가르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8절에서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일대일을 비롯한 여러 가지 말씀을 선포하는 상황 속에서 많은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영혼과의 관계가 깨어질까봐, 다른 사람들에게 개독교인이라고 불릴까봐, 말씀을 선포했을 때 언쟁이 생길까봐 등 우리에게는 두려움을 주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8절 후반부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왜 굳이 하나님께서는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을까요? 간단합니다. 내가 보장한다는 말입니다. 약속하겠다는 말입니다. 맹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계약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마지막에 도장을 찍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계약서에 상세하게 써있다고 하더라도 도장이 찍혀있지 않다면 그 계약서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이런 보증까지 하시며 유효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9절 말씀에 하나님께서는 주의 손을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예레미야의 입을 안수해주십니다. 우리의 입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안수해주십니다. 누가복음 12장 12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고 말씀을 선포할 때에, 그리고 그 결과 언쟁이 붙은 상황에서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할 말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영접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 속에서도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나의 능력, 현실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든 조건과 상황이 이를 행할 상황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바라봐야할 곳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지혜뿐입니다. 이것에 의지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오직 한 가지,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캠퍼스에서 학업을 감당하는 가운데, 우리는 틈틈이 우리 주변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고 이들에게 말씀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후에 졸업한 뒤에 우리가 있는 일터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곳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10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를 여러 나라, 즉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십니다. 그의 위치를 높이 올리신 것입니다. 한낱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었던 그를 세계로 부르시고 세계적인 선지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세상의 부정적인 것들을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린다고 하십니다. 긍정적인 것들을 건설하고 심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렇게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과거형으로 이미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가장 앞에서 “보라” 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보라”, “보라”, 여러분들에게 볼 것을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위치를 높여 주십니다.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이 서울대 캠퍼스에서 그 많은 뛰어난 학생들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고 별 영향력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서울대 캠퍼스에서 목자로 세워주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세계의 목자로 세워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사명을 감당하였을 때 나타날, 이루어질 일들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정적인 것을 끊게 하십니다. 우리가 뽑고 파괴하고 파멸시킬 대상은 무엇일까요? 반기독교적인 감정입니다. 이 세대에 만연한 개인주의를 넘어선 이기주의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이루실 긍정적인 역사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예배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일대일 말씀 공부가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목말라하는 서울대 양들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영혼 구원 역사에 도움이 되는 많은 일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 이제 시작될 가을 학기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들을 하나님께서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이 보이십니까? 세상의 눈으로는 이것이 도저히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렸을 때 우리는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통해 이 캠퍼스에 이루실 역사들을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받고 이 전에 제가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이 얼마나 세상적이고 성경적이지 않은지를 깨닫고 이에 대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눈을 갖고 있었고 이것을 통해 저를 평가하고 세상을 평가하였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예레미야와 같은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저는 아이라 할 수 없다는 반응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서울대 캠퍼스의 목자가 되라고 하신 그 말씀이 부담으로 다가왔고 신앙적으로 좀 더 성숙해져야 할 수 있을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교대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을 때는 정말 생뚱맞은 말씀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영혼 구원을 가장 귀한 가치라고 생각한다면 이에 대한 반응이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캠퍼스 목자로서의 사명은 캠퍼스에 내가 있을 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학생의 때가 아니라면 제가 언제 캠퍼스 목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학생의 때가 지나도 물론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학생일 때만큼 쉬울 때가 있겠습니까? 학생일 때가 다른 때보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어려운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나의 역량이 부족한 것, 나의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바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입을 안수해주셨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할 말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교대를 위한 기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면 정말 비효율적이고 다른 사람들이 의아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저 또한 이해할 수 없었고 학생 신분인 내가, 그것도 서울대학교 학생인 내가 교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약간 오버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약간 눈치를 보게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영혼 구원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 오버한다는 생각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내가 교대를 위해 하는 기도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한 명의 예배자가 설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사실 이것은 예비 제사장이었던 예레미야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주었던, 민족이 망해가는 시점에서 이를 선교의 기회로 생각하셨던 오늘 말씀 속 ‘paradigm shift’를 생각한다면, 그리 충격적인, 오버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좀 더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로 하였고 서울대의 캠퍼스 목자로, 교대를 향한 기도자로 서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영접하기로 하였습니다. 서울대의 캠퍼스 목자로 바로 설 수 있도록 기도하기로 하였습니다. 교대를 위해서, 정확히 말하면 교대에 한 명의 예배자가 설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지금도 온전히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주님 주신 사명에 순종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희생과 헌신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갖고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탓입니다. 습관은 꾸준한 노력을 통해 고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눈을 갖기 위해 계속해서 신경 쓰고 노력하고자 합니다. 매일 매일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다보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시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 노력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주님께서 이루실 영혼 구원의 역사들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번 가을 학기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가 기대 됩니다. 앞으로 제 삶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들이 기대 됩니다. 이번 가을 학기에는 이 말씀을 항상 머릿속에 되뇌어야겠습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 내가 세상의 눈으로 나를 평가한다면 저는 분명히 아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눈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항상 함께하시고 위기의 상황에서 구원해주실 것을 약속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이번 가을 학기에 일어날 일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판단하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말씀과 사명들을 위해 기대하는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내가 하나님의 눈이 아닌 세상의 눈으로 이것을 판단하고 있지 않은지 한 번 더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요절 말씀(6, 7절)을 같이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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